Peter Zumthor 순례
2026.02.20 관리자 조회수 133회[Peter Zumthor 순례]
"페터 춤토르의 건축물을 찾는다. 역사의 희극과 비극을 읽고, 거장의
문법을 경외하며, 자신을 돌이켜본다."
니체의 비극의 가장 큰 미덕은 아폴론적인 구원을 넘어 디오니소스적인 인식에 대해 통찰하고 깨닫게 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삶이 윤리적이며 장엄하게 흐르는 정적인 무엇이 아닌 역동적이며 때로는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능한 무엇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학창시절에 읽었던 니체는 특유의 통찰력으로 익숙하게 조련된 일상을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게 했다. 뜬금없는 이야기처럼 들릴 지 모르겠지만, 나는 낯선 곳을 방황할 때면 늘 니체가 이야기했던
그리스 비극의 미덕이 떠올랐다. 어느 장소든지 그 도시 역사의 희극과 비극을 드러내고 있으며 우리는 현재의
관찰자 시점에서 그들이 지닌 디오니소스들을 읽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축과 도시는 생경한 역사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물이자 앞으로 펼쳐내야 하는 미래의 역사인 것이다. 건축가가 된다는 것은 상당히 오랜 시간의
실무적 수련과 경험, 그리고 도시와 건축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관점을 필요로 한다. 단지 방수 디테일이나 지붕의 접합상세와 같은 기술이나 노하우가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현재’란 무엇인지, 우리가 서 있는 이 시대에 대한 통찰을 필요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건축은 일반인들에게도 꽤나 값어치 있는 공부의 대상이다. 특히 역사의 희극과
비극을 통해 지적 욕구를 충족해야만 성에 차는 사람이라면, 여행지에서 음식이나 미술관의 유명한 그림을 경험하는
데 더해 도시와 건축 그 자체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바꿔 말해 건축 순례는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스스로를
낯설게 함으로서 새로운 공간과 시간 속에 자신을 객관화하는 행위다. 나는 이런 기행이 주는 특유의 낯섦을
즐기곤 했다. 유학시절부터 답사여행은 단지 건축에 대한 공부를 의미하지 않았다. 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자 거대한 역사적 현장 속에 나와 현재를 투영시키는 성찰의 과정이었다. 특히 거장의 걸작들을 찾아갈 때는 수도승이 전설적인 수도원을 찾아가는 심경으로 경건해지곤 했다. 답사의 순간마다 한없는 감동을 느꼈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작아져 버리는 스스로의 존재감을 애써 추스려야 하기도 했다.
그것은 일종의 경외이자 종교적인 감동이었다. 만약 그 순간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현재 내가 추구하는 건축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세계적인 건축가 페터 춤토르는 그러한 경외의 대상들을 만들어내는 현존하는 건축가 중 한명일 것이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 졸업반시절 에 실린 그의 특별판에서였다. 거창한 설명 없이
시커멓게 책 한 권을 내품은 강렬한 건축 단면도는 강렬해서 오랜 시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후 프랑스 남부
그르노블에서 어학시절 귀동냥해가며 청강생으로 건축학교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가 쓴 ‘건축과
재료’라는 글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글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와 닿았던 것은 어릴 적 그가 느꼈던 건축적
경험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나무에 패인 골에서 느껴지는 시간성과 재료의 감성들에 관한, 그리고 그것들 속에 간직한 기억의 심상들. 거창한 성리학적 담론들을 펼쳐놓은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태초적 감성 그 자체였다. 나도 어렸을 적에는 종종 할머니 댁의 마루의 홈 속에 무언가를 집어넣으면서
무한한 과거를 상상하곤 했다. 그때의 봄볕과 공기의 내음, 시간 속에
닳은 재료의 매끈함은 여전히 나의 촉각 속에 남아있다. 파리에서 공부할 때 그의 걸작 발스 온천장
(Therme Vals)에 관한 인터뷰가 실린 퐁피두판 DVD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이 고집스런 스위스 건축가를 처음 보게 되었다. 묘하게도 그는 정말 춤토르처럼 생긴 춤토르같은 건축가였다.
까칠하게 자란 흰 수염은 시거 연기에 묻혀 유난히 빛나고 있었고, 인터뷰 내내 그는
영어에 능숙치 않은 듯 간간히 가래 섞인 거친 독어를 아주 느리게 구사했다. 종종 그는 시거 달린 손을 주섬주섬
책상위로 담으며 한마디씩 내뱉곤 했는데 그 순간마다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소름이 느껴졌다. 그는 그저 장인이였다.
거창한 말과 철학적인 미사어구는 감히 그에게 덤비기엔 일회용 영화 소품 같은 것들처럼 가벼웠다. 그는 말로 하는 입담꾼이 아니라 ‘쟁이’였기 때문이다.
그의 걸작인 발스 온천장으로 가려면 스위스에서도 외지고 외진 지방인 쿠어 (Chur)에서 기차로
한 시간, 버스로 한 시간을 더 들어가야 한다. 여정의 풍광도 아주
수려한데, 이 지역은 원래 돌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온천장의 물은
아주 특별한 효험을 지니고 있어 요양장소로 유래 깊다. 하지만 피터 줌터의 건축은 사람들을 온천과는 다른
방식으로 치유한다. 그의 온천장은 사람을 원시적으로 되돌려 인간이 지닌 이기심과 허영을 단숨에 해체해버리는
기이한 효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진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촉각적이면서도 후각적인 재료의 구사,
공간과 빛, 그리고 재료의 물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형성되는 특정한 공간 본질은 행복감을
안겨주는데, 미사어구를 쓰기가 힘들어진다. 그는 대지의 감성을 가지고
그곳에 너무나도 특별한 장소를 만들어냈다. 직접 경험한 그의 건축은 상상 속의 공간 이상의 것이었다.
파란 화강석은 그 자체의 본원적 성질을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길게 재단되었고, 다시 물과 만나 아주 매끈한 표피를 가진 다른 무엇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내부의 공간은 수혈주거시대의
원시인이 발견한 새로운 석굴처럼 깊이 있게 패여 빛을 떨어트리고 있었으며, 동시에 내부를 분절하면서 가로지르는
다양한 온도의 물과 함께 그 스스로를 은폐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물과 자연을 탐닉하는 원시인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공간을 표현한다면 모던하게 절제된 침묵 속에서 우리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매주 목요일 저녁이 되면 그곳 온천장에 ‘사일런스 배싱Silence Bathing’이 열린다.
일종의 침묵욕인 것이다. 그 광경은 마치 스탠리 큐브릭 감독
<아이즈 와이드 셧> 속의 비밀 집회를 연상케 했다. 온천장은 외부와 내부가 이어져 있는데 서로 다른 컨셉과 물의 온도로 구분되며 동시에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외부에서는 침묵욕의 장관을 맛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입을 다문 채 하얗게 피어 오르는
증기 속에서 서로를 의식할 수 있었으며 거대한 산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쇠똥과 잡초의 냄새가 만연해 있었다. 하지만 돌과 물이 만나는 지점에 앉은 우리는 인간과 자연이 만나는 그 매끄러운 감촉에 행복해 했으며 적당히 데워진 온천의 온기 속에서
온 감성을 다해 원초적인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빛이라고는 온천장 하부에서 피어 오르는 푸른 빛뿐이었으며
소리라고는 간간히 들려오는 방울소리와 사람들이 떨구는 물자락 소리뿐이었다. 감성은 재료와 사람이 만나는 표면에서
발생한다. 나는 그곳에서 건축을 보았다기보다 건축이 주는 행복을 느꼈다.
발스 온천장이 자연과 인간이 만나야 할 지점을 보여주는 건축이라면 독일 쾰른의 콜럼바 뮤지엄 (Kolumba
Museum)은 역사적인 도시가 지닌 컨텍스트와 현재의 건축이 만나 어떻게 새로운 역사를 써가야 하는지에 대한 명료한
해답을 제시한다. 2차세계대전 폭격에 의해 폐허와 된 성당을 박물관으로 복원한 이 프로젝트는 건축에 있어서
시간성을 달리하는 재료가 빚어내는 공간적 감성을 빛의 시퀀스와 감도를 통해 드러낸다. 전쟁의 잔인함을 아폴론적으로
드러내지만, 또한 전쟁의 디오니소스를 섬찟하게 드러내주는 역설을 내포하고 있다. 과거의 기억들이 현재로 불려왔을 때 건축적으로 무엇을 담아내고 표현해야 하는지를 절제된 어휘로 담담히 이야기하는 듯 하다.
특히 덴마크 Petersen TEGL사의 목탄으로 구운 벽돌을 이용해 성당이 지녔던
역사적 컨텍스트를 재해석한 대목에서는 재료의 물성이 어떻게 시간성을 대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 사용된
특유의 잿빛 장변형 벽돌은 통상적으로 우리가 보던 한국식 벽돌과는 크기와 비율 면에서 아주 다르다. 복원을
위해 생산된 새로운 비율의 벽돌은 마치 화강석을 절단해놓은 것처럼 수평적으로 쌓아 올려져 거대한 요소들의 군집체를 형성한다. 요소가 모여 질감이 되고 질감이 하나의 단일한 볼륨감을 형성하며 내부공간을 빛으로 재구축하는 것이다. 중세 스테인드 글라스를 다감한 선생님이 설명해주는 종교적 교리에 비유한다면 콜럼바 뮤지엄 내부 벽돌 사이로 쏟아지는 빛들은 온화한
선생님이 침묵으로 화를 내는 듯 매섭게 느껴진다. 그것은 사물에 대한 일상적인 서사가 아니다.
공간적 감성을 극대화함으로서 만들어질 수 있는 시간적 감성에 관한 것이다.
질료적 감성에 대한 그의 탁월함은 독일 바겐도르프 (Wachendorf)에 위치한 브러더 클라우스
교회 (Bruder-Klaus-Feldkapelle)에서도 느낄 수 있다. 건축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이 조그마한 교회는 건축에서 구축의 과정이 어떻게 공간을 시적으로 생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원목 112여개를 일정한 형태로 박고 가운데에 상단이 노출되는 빈 공간을 만든
후 그 위에 콘크리트를 붓고 기존 원목을 태워 내부에 일정한 원형 패턴을 만들었다. 이렇게 구성된 내부의
검은 목조패턴은 상부의 빛과 어우러져 극도의 시각적, 혹은 공감각적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동시에 외부 표면은 농부들이 하루하루 쌓아 올린 콘크리트의 흔적들을 그대로 노출해 거대한 질감이 형성되어 있다. 이 극단적인 방식의 건축기법은 세계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페터 춤토르만이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콘크리트 빛깔이 주는 섬세한 감성들은 주변 갈대 숲에 어울려 자연의 일부로써의
순례의 길을 만들어준다. 이 교회로 인해 평범한 들판은 한편의 시가 되어 버렸고, 일상적인 하늘은 인간과 신의 존재를 이어주는 캔버스가 되었다. 평범한 대지에 평범치 않게 놓여진
이 시적인 건축물은 인간의 지극한 선물인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건축 순례는 숭고한 것이다. 거장들의 공간을 탐미하고 학습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선입견, 나아가 기성적인 모든 것을 비워내는 일종의 성찰
과정인 것이다. 그러한 기행의 과정에서 우리가 만들어가는 일상이란 얼마나 거대한 역사이며 유의미한 것인가를
깨닫는다. 동시에 우리가 존재하는 의미를 되새긴다. 아름다운 건축은
우리가 가진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며 우리가 살아있음을 드러내주고 각인시킨다. 그리하여 도시와
건축을 기행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일상으로부터 자신을 거세하는 경건한 행위가 된다. 건축과
도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대지에서 살아온 그들의 문화와 풍습, 그리고 미학을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스스로를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게 만들고 좀더 넓은 관점에서 우리의 역사와 미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페터 춤토르의 건축은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이어야 하며 시간과
자연속에서 건축이란 어떠한 것이어야만 하는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그것은 시대의 흐름에 변하는 유행 같은
것이 아닌 건축 공간이 생성해내는 본질에 대한 질문처럼 우리가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반추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렇듯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들어보고 생각해보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이 시대 동인이 공감 할 수 있는 가장 지극한 감성적 여정일
것이다. 한번쯤은 페터 춤토르의 건축을 답사해보고 그가 이야기하는 공간본질에 대한 이야기들에 공감해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죽기전에 반드시 해야할 건축순례의 길인 것이다.
2018.10
이정훈
[이 글은 Luel 매거진으로부터 공식 기고 의뢰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